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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딪고 일어서며 . . .

Posted by kitinger779 in 분류되지 않음

- 아래의 글은 정신장애를 경험하셨지만 희망을 가지고 재활 활동을 하신 분의 재활수기입니다. -

 

학교 다닐 때의 나는 모범생이었으며 고등학교 때의 성적은 상위그룹에 속했다. 청소년 시절 나의 꿈은 의사가 되어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을 고쳐주는 것이었다. 고3때 담임선생님이 서울대 공대를 목표로 하여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셨으나 노력한 만큼의 성적이 나오지 않아 선생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국립대학교 미생물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 후 나는 같은 과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따돌림 당하는 기분이 들어 1학기 중간고사를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아버님이 학과장님과 논의한 끝에 계절수업을 듣게 되었다. 이후 군대에 가기 전까지 나는 공부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고 학교 종교동아리에 흥미를 느껴 활동하였다. 군 제대 후에는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젊은 나이에 제약회사에 입사하게 되어 부모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었다. 입사 후에는 진단시약을 만드는 시약과에서 정말 열심히 일 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발병한 시기는 94년 늦을 봄쯤으로 기억한다. 입사 후 3년 조금 넘은 시기였다. 승진, 나보다 2살 많은 신입사원의 입사 등… 나를 둘러싼 주위 환경이 변화하면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인관계도 미숙하여 일과 사람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였다. 출근 후 탈의실에서 배회하거나 작업장에서 서성거리곤 하였고 퇴근 후에는 도로변에 앉아 있거나 집밖에서 방황하다 자정이 넘어서 들어오곤 하였다. 어느 누구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을 신봉하는 아버지도 이병이 낫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굿을 하였다.

 나의 직속상사는 나의 기능이 많이 저하되어 더 이상 근무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였으나 부서장님이 연구소로 한달 간 출장 가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래서 입원하지 않고 외래로 병원에 다니면서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였고 이때는 왜 내가 약을 먹어야 하는지를 모른 체 약을 복용하였다. 연구소에서는 아침 식사 후 약을 복용하면 성분 중에 수면제가 들어있어 출근 후 구석진 곳을 찾아 자기 바빴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졸리던지…

한 달만의 출장 후 부서장님의 권유로 타부서로 옮기게 되면서 나이나 경력에서 나보다 선배인 부서원들의 도움으로 병과 싸움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 나는 내 병이 어떤 병인지도 모른 채 살과의 전쟁에 들어간 후 한 달 만에 6kg을 감량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달리기를 하며 아침식사는 계란후라이 한 개 점심은 조금.. 꾸준한 운동으로 몸과 마음이 거의 정상에 가깝게 회복되었다.

 그동안 고비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한때는 회사생활이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부모님의 도움으로 견딜 수 있었다. 이때 회사를 그만 두었다면 부모님께서 더욱 힘들어하였을 것 같다.

신제품 프로젝트가 끝난 후 96년 초 부서장님의 지시로 타부서로 옮기게 되었다. 새로운 부서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젊은 부서원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왔다. 그러다가 97년 여름 나의 반려자가 될 사람을 잘 아는 분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사귀게 되었다. 그러다가 97년 IMF가 오면서 힘들어지기 시작하더니 사람과 일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스트레스를 갖기 시작하였다. 추측하건데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상태가 안 좋아 지더니 98년 3월 결혼 후 상태가 눈에 띄게 안 좋아져 망상이 심해지고 동료들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을 그룹으로 나누기 시작하였다.

평범한 사건을 보더라도 무언가 다른 의미를 달아 받아 들였다. 예를 들면 점심식사 시간에 못 보던 사람이 있으면 집사람과 연관 지어 생각하고 집사람 뒤에는 다른 조직이 있으며 집사람이 그 조직의 일원이고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식사를 할 때 나오는 반찬에 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콩나물은 ‘당신의 의견, 생각을 듣겠다’, 시금치는 ‘힘을 내어라’, 김치는 좋다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고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그런 망상이 더욱 심해지자 끝내는 폭발하였다. 밥상을 뒤집고 문을 발로 차는 등…

그리하여 처음으로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였으나 폭력적인 것은 사라지고 망상은 여전히 입원전과 마찬가지였다. 몇 개월 후 병가를 내보라는 상사의 말대로 병가를 내고 3개월간 집에서 쉬게 되었다. 다행히 병가 후 상태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상사의 권유로 타부서로 옮긴 후 망상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잠재되어 있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렇게 1년을 넘게 근무하다가 상사가 내 적성에 맞는 타부서를 추천해 주어 근무하게 되었다. 여기서 내가 맡은 업무는 작업환경을 기준서에 나오는 기분대로 유지 할 수 있도록 시설을 검사,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2000년 7월 일과 사람에게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였다. 일상적인 일을 나와 연관 짓고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망상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면 두 세력 중 한 세력이 불만이 있다고 생각되므로 창고 등 남이보지 않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서성거렸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암실에서 엎드려 있곤 하였다. 커피를 마시는 것도 두 세력 중 한 세력을 동조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다른 세력의 눈치를 보아야만 한다는 터무니없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동료들과 책상을 마주하여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으며 서무 아가씨와 나란히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자꾸 무언가의 메시지를 보내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증세가 악화되자 9월 중순쯤 같은 동료의 제안과 그리고 동물 실험실 책임자의 동의로 부서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힘들었으며 망상이 줄어들지 않고 확대 증폭되었고 망상에 대한 믿음의 확신만 커질 뿐이었다. 거의 정신력으로 버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망상에 빠져 있으니 대인관계가 원만할 수가 없었다. 동료들은 내가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의 망상은 알 수가 없어 도대체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책임자는 나와 대화를 시도하면서 나를 도와주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역효과만 났다. 이렇게 힘겹게 지내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병원을 바꿔서 병원 선생님과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차츰 안정을 찾아가며 증세가 호전되었다. 다시 재기해야 한다는 그런 신념으로 피우던 담배도 끊고 내 주위의 동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정말 열심히 일하였다. 일을 열심히 할수록 증상이 나아지기 시작하였고 책임자도 내가 담배를 끓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내가 정신분열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병식은 생겨나지 않았다. 이러한 병식이 없는 한 증상이 호전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또 다시 망상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생각하기 끔찍할 정도로 커지기 시작하였다. 텔레비전에서 하는 프로 중에 드라마와 오락, 심지어 영화까지도 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집과 회사 심지어 부서 회식 때에도 도청장치가 따라 다닌다고 생각하였다. 집사람의 말대로 내가 딴 세상 사람 같다는 표현이 정확한 것이었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나의 망상은 새끼를 치기도 하고 새로 생겨나기도 하였다.

 9~10개월 간 매주 한 시간씩 면담을 해오던 선생님이 나와 작별할 때 나에게 관계망상이 있고 이를 극복해야한다고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이때까지도 병을 받아 들이기 어려웠다.

 망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며 나에게 그다지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 집사람은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이혼을 요구하였다. 그나마 병원에 입원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혼 후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고 증상이 좋아지다가 나빠지다가 하였다가 2003년 경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12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명예퇴직하게 되었다.

 이후 수도권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대구로 내려와서 다음날 바로 사회복귀시설로 갔다.    망상을 안은 채 사회복귀시설에 다니며 재활을 위한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매 순간 순간 망상에 시달리면서도 매일아침 운동하고 재활프로그램을 누구보다 열심히 참석하며 재활을 위한 투쟁에 들어갔다.

 기초교육, 약물증상, 스트레스, 대인관계교육 외에도 인지재활, NIE, 음악치료, 원예치료, 채플, 자신감 향상 등 20여개이상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건 환우들과 같은 고통을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고통스러워하는 환우들의 심정을 최대한으로 이해하려는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과 병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지금 당장 결정해야한다는 단호한 마음이 생길 수 있게 저희들에게 자극을 주시는 선생님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 닿았다. 환우들과의 관계는 그 어떤 조직에서도 볼 수 없었던 끈끈한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며 이 시련에서 일어설 수 있도록 서로 도우는 상부상조의 정신이 감명 깊었다.

 2003년 7월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병을 고쳐야한다는 나의 결심, 나를 아껴주시고 누구보다 지지해주는 부모님, 회복되기에 더 없이 좋은 센터 분위기와 프로그램 그리고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나의 생각과 행동의 족쇄이었던 망상을 없앨 수 있었다. 2003년도 하반기와 2004년도 상반기에는 사회복귀시설 내 회원들의 모임의 회장직을 맡으며 선생님들과 회원들의 의사소통의 가교역할을 담당하며 환우들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 하였다. 선생님과 회원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언제든지 회원자신의 문제를 상담할 수 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있어 체계적으로 자기증상이나 문제를 관리하고 있다.   아침회의가 끝난 후 청소시간에는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센터 구석구석을 청소하며 가꾸고 회원들의 의사에 따라 교육을 받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으며, 잘 어울리지 못하고 말수가 적으며 고립된 속에서 지내는 회원들은 축구경기를 통해 활기 있게 같이 지내는 모습을 보았을 때 기쁨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치회의 시간에 회원들의 의사에 따라 스포츠교실, 사회현장훈련, 주말활동의 내용을 결정하며 참여하고 건의사항을 말하는 가운데 공동체 생활에 적응하고 자기의사를 표현하는 훈련과 잠재되어 있던 개개인의 능력을 포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도 기쁜 일이었다. 주어진 교육을 마친 사람은 최종적으로 취업 전 교육을 받고 장애인고용촉진공단과 연계되어 취업을 하게 된다.

 나는 과거에 취업 전 교육 이수 후 자동차 부품회사에 취업을 하였다가 손가락 관절이 좋지 않아 회사를 몇 번 바꾸다가 현재는 우연히 알게 된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산하 대구직업능력개발센터를 1년 정도 다닌 후 사출금형 제조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앞으로 교육을 통해 이 병이 어떤 병인지 잘 알고 있기에 그리고 상담할 수 있는 선생님이 계시기에 다시는 재발하지 않을 것으로 굳게 믿으며 직업재활을 통해 많은 자신감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하나님이 왜 이 고통을 주셨는지 생각해보면 이런 시련과 고통을 통해 이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볼 수 없는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겸손하게 하시기 위함이며 더 큰 그릇으로 쓰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이 있음을 믿는다. 지금도 여러 증상으로 고통 받는 환우들을 생각하며 당당히 싸워서 이겨 기쁨의 날이 오길 바란다.